[민낯 드러낸 디지털정부, 전면 개조 시급하다]
전력시설분리, 재해복구 체계 실효성 등 기본 원칙 위반  |
| 지난 9월 30일 오전 대전 국가정보자원관리원 화재 4일차 합동감식이 시작된 가운데, 합동감식반이 화재 현장에서 반출한 리튬이온 배터리를 운반하고 있다. 뉴스1 |
[파이낸셜뉴스] 2023년 초유의 행정전산망 장애를 겪은 뒤 2년만에 '국가 전산망의 심장'이 다시 멈췄다. '세계 최고 전자정부' 위상도 허울에 불과한 것 아니냐는 비난이 일고 있다. 초유의 전산망 마비 사태를 겪고 있는 한국은 지난해 말 유엔 전자정부 평가에서 3회 연속 세계 1위를 차지한 바 있다. 표면적인 전자정부 평가 결과만 보면 한국은 모든 지표에서 세계 최고 수준이다. 그러나 지난 9월 26일 발생한 국가정보자원관리원 화재로 정부 데이터센터 운영방식은 애초 원칙과 실제 운영 형태가 달랐고, 재해복구(DR) 시스템은 예산낭비라며 번번히 미뤄지는 등 디지털행정 곳곳에서 허점투성이 민낯을 드러냈다. 세계 최초라 자부하던 대한민국의 디지털정부는 이제 효율과 비용절감의 신화를 넘어 위험과 불안의 대상이 됐다. 2005년 행정 디지털화로 세계에서 가장 편리하고 빠른 대국민 서비스를 표방한 '대한민국의 자랑'이 단순 효율에서 복원력으로, 국민의 걱정에서 믿음직한 행정서비스로 바로 설 수 있는 길을 찾는다. (편집자 주)
"통합전산센터, 데이터 집중 리스크 보완책 있었다"
"사고는 언제든 발생할 수 있다. 문제는 얼마나 빠르게, 안전하게 복구하는가다." 올들어 대기업들의 기업들의 사이버 침해사고가 잇따르더니 전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정부의 디지털행정이 멈췄다. 배터리 교체 과정의 불씨 하나가 전국을 멈춰 세웠다. 사고의 위험은 급속히 커지고 있지만, 이를 예방하고 복구하려는 노력은 턱없이 부족한 현실이 이번 국정자원 화재 사고의 핵심이라는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지난 2005년 출범 당시부터 우려점으로 꼽힌 데이터센터 집중으로 인한 취약점이 이번 화재로 고스란히 노출됐다. 그러나 통합전산센터의 데이터 집중으로 인한 취약점은 센터 기획 단계에서부터 우려 대상이었고, 이를 해결할 대책을 마련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 2004년 정부통합전산센터 기획에 참여한 한 고위 공무원은 "통합전산센터 기획 당시부터 데이터 집중에 대한 취약점을 알고 있었고 당연히 해결방안도 있었다"며 "통합전산센터 구축에서 백업체계와 재해복구(DR)시스템 구축은 필수 과제로 제시됐었고 계획과 예산이 마련됐었다"고 밝혔다. 문제는 실제 센터 운영 단계에서 이를 적용하지 않은 것이다. 2004년 당시 전자정부 위원으로 정부통합전산센터 건립 추진위원장을 지낸 정태명 전 성균관대 소프트웨어대학장(현 히포티앤씨 대표)은 최근 언론 인터뷰에서 "국정자원 전신인 정부통합전산센터 건립 당시 대전 본원과 광주 센터 간 실시간 백업 시스템이 정상 작동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낡은 전화국 건물 질려쓰는 '디지털행정의 심장'
전문가들은 기초적인 부분은 외면한 채 성과 위주의 정책을 펼쳐온 정부 데이터센터 정책을 질타한다. 특히 국정자원 본원이 데이터센터로 설계되지 않은 건물을 전산시설로 활용해왔다는 사실도 도마 위에 올랐다. 정부통합센터는 대전·광주·대구 3중 체계와 공주 재해복구센터를 통해 한 곳에 문제가 생기면 즉시 다른 곳에서 서비스를 이어받는 '무중단 시스템'을 자랑해 왔다. 그러나 단 한 번의 화재로 정부의 행정서비스가 일시에 중단되면서 국정자원의 백업 시스템 및 네트워크 운영이 그간 정부의 큰소리와는 다르게 운영된 것으로 밝혀졌다. △전력시설 분리 △재해복구 체계 실효성 △화재 대응 특수성 등 국가기간전산망을 운영하는 기본적인 원칙들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던 관행이 드러난 것이다.
특히 대전 본원은 데이터센터로는 구조적·기술적으로 부적합하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돼 왔다. 행정안전부는 이를 무시하고 20년 장기 임대 이후 계약 연장만을 반복하며 실질적인 대체 방안 마련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다 화를 키웠다는 주장이 나왔다. 업계에 따르면 국정자원 대전 본원은 대전 유성구 KT 제1연구소 건물 리모델링 시설이다. 20년간 장기 임대 후 올해 계약 종료를 앞두고 있었던 것으로 파악됐다. 그러나 국정자원은 크게 문제가 없다고 보고 사용 기간을 연장해 오는 2030년 8월까지 사용키로 최근 계약을 갱신했다.
준공 20년이 지난 대전 본원 시설은 상당히 노후화가 진행됐던 것으로 알려졌다. 또 지난 2007년 문을 연 광주센터와 지난해 개소한 대구센터와 달리 한 전산실에 서버와 배터리를 혼재해 운영했던 데다, 중요 서버와 배터리 간 이격이 약 60㎝에 불과해 화재에 취약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재해복구 시스템이 이번에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충격파는 컸다. 전문가들은 건물 계약 기간을 인지했고 대비할 시간도 충분했음에도 나서지 않았다는 것은 컴퓨팅 인프라에 대한 행안부의 인식과 업무 우선순위가 높지 않았다는 것으로밖에 이해되지 않는 처사라고 정부의 태도를 꼬집었다.
재해복구 예산은 '삭감 대상'(?)...예산절감의 덫
행안부의 안일한 대응도 문제다. 지난 2023년 행정 전산망 마비 사태를 겪은 뒤, DR시스템 구축과 운영에 대한 시급성이 제기된 바 있다. 그러나 행안부는 지난해 4월 각 부처에 ‘1·2등급 DR구축 투자 금지’ 라는 예산 가이드라인을 내렸다. 국민들의 이용이 많고, 중요성이 높은 순서로 매긴 1·2등급 행정서비스에 DR구축을 멈추라는 신호다. 이에 대해 행안부는 "장애 발생 후 즉각 백업시스템이 가동되는 액티브·액티브 시스템을 도입하는 시범사업을 계획중이어서, 주요 시범 사업 후 2026년부터 본격 투자하겠다는 방침이었다"고 설명했다. 행안부 이용석 디지털정부혁신실장은 “잘못된 방향 투자로 비용이 발생하는 걸 막기 위해 시범 후 모델 확정이 필요했다”을 공유했다. 예산절감의 덫이 디지털 서비스 운영의 핵심인 DR이 뒷전으로 밀쳐낸 셈이다. 윤호중 행안부 장관은 “내년(2026년)도 이중화 예산이 충분치 않다”며 “국회에서 증액해주면 기획예산 당국과 협의하고, 부족하면 예비비라도 투입하겠다”며 여전히 소극적 입장을 나타내고 있다.
이에 따라 앞으로 분산형 인프라 구축을 통해 다중 데이터센터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단일 센터 의존을 탈피하고, 지역별로 분산된 백업 센터를 구축해 장애 발생 시 자동 전환 가능하도록 설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민간 클라우드와 공공 클라우드를 병행 활용해 유연성과 확장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지적에도 힘이 실린다. 미국, 에스토니아 등은 이미 클라우드 중심으로 전환 중에 있어 이를 벤치마킹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다.
무엇보다 이번 화재로 재해복구 시스템 강화는 시급한 사안으로 떠올랐다. 핵심 시스템은 실시간으로 이중화하고, 장애 발생 시 자동으로 복구되는 구조로 설계하는 한편 정기적 모의훈련 및 감사를 통해 단순 기술적 구축이 아니라 실제 상황을 가정한 복구 훈련과 외부 감사로 실효성을 확보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강조한다. 국정자원 화재로 드러난 전자정부의 구조적 취약성을 해결하기 위한 근본적인 대책은 단순한 복구를 넘어, 디지털 행정의 체질 개선과 거버넌스 혁신을 포함해야 한다는 주문이 쏟아지고 있다.
ktitk@fnnews.com 김태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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